대한민국 근현대사 중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제주4.3사건.
최근 들어 제주4.3과 관련된 각종 왜곡과 곡해로 도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추념식을 하루 앞두고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
제주 봉개 /
제주의 아픈 기억을 걷다, 제주4.3평화공원
제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주4.3평화공원.
위치 /
제주도 제주시 명림로 430,
제주4.3평화공원인스타 /
@jeju43peace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운데
바람은 꽤나 거세게 불었다.

멀리 제주4.3평화기념관이 보인다.
공원 전체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니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왔다.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니
작년에 이맘때 취재를 나갔던 잃어버린 마을이 문득 생각났다.
제주4.3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불에 타 없어진 “잃어버린 마을”은
낮은 돌담과 함께 대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자연의 소리가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이다.
제주의 상징 동백꽃.
4.3의 아픔과도 결을 같이 한다.

잃어버린 마을이 생각나던 장소.
내일 있을 추념식 준비가 한창인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던
제주4.3평화공원.

거센 바람에 벚꽃 잎이 떨어져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다.
공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위령탑.
모두들 애도하고, 추모하는 분위기다.

많은 유가족들이
비석을 닦고, 꽃을 놓고 있었다.
이토록 어린 나이에 행불자가 돼버린 희생자들이
넓은 비석에 빼곡히 적혀있다.
어딘가 쓸쓸한 공허의 공간.

멀리 있는 원처럼
상처가 아물고 치유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공원을 모두 둘러본 뒤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았다.
위치 /
제주도 제주시 명림로 430,
제주4.3평화기념관시간 /
월 – 일요일, 09:00 – 18:00
입장 마감 17:00
첫째 주, 셋째 주 월요일 휴무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

“4.3백비”라는 이름으로 누워있는 이 비석은
언젠가 “4.3사건”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하나의 역사로 정립될 때 다시금 일어나 새겨질 것이다.
볕 들 날을 기다리며.
사실 지금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로 쓰이며 수많은 도민이 노동 착취를 당하고,
해방되자 곧이어 터진 4.3사건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당했으며,
이 와중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제주의 청년들은 전선으로 나아갔다.
오랜 시간 동안 육지로부터 박해받던 제주도가
지금은 이렇게나 사랑을 받으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제주4.3의 발단은 삼일절 행사 후 벌어진 가두시위 중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지나가자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는데,
이를 총으로 응수하며 여섯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한 것이다.
심지어 총을 맞은 사람들은 시위대가 아닌
지켜보던 시민이었기에 도민 사회의 공분이 컸다.
사망한 여섯 명의 도민.
이후 항의와 시위가 계속되자 군경은 도민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회는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 아래
제주도민 대부분에게 좌파 프레임을 씌워 테러를 일삼기 시작했다.
도민을 향한 서청의 잔혹한 학살이 계속 됐음에도
정부와 미군정은 묵인하고만 있었다.
제주4.3의 정의는 이렇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자 제주는 붉게 물들었다.
“초토화 작전”이란
해안선으로부터 5km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은 모두 총살하며,
한라산을 금족 지역으로 지정, 중산간 마을을 모두 태워 파괴한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중산간 마을의 95%, 가옥 4만 채가 불에 타 소실됐다.
대부분의 마을은 제주4.3 이후에도 재건되지 못해
현재는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좌익 단체 남조선로동당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극우 단체 서북청년회는 빨갱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그 범주에 제주도민을 포함시켜 무자비한 학살을 했고,
국가는 이러한 만행을 보고도 묵인했다.
실제 취재를 나갔던 다랑쉬 굴도
한 편에 모형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현재 구좌읍에 위치한 다랑쉬 굴은 입구가 막혀 들어갈 수 없지만,
전시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확인된 희생자만 14,660명.
실제로는 약 3만여 명이 사망했을 걸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7년 7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서야
4.3사건이 종식될 수 있었다.
취재 때문에 많이 찾아다녔던 잃어버린 마을.
제주4.3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한 제주도민은
지금까지도 생존적인 면에서 진보, 좌파에 반감을 표현한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 또는 친척이 무고하게 4.3사건 당시 사망했더라도
연좌제를 우려해 희생자 신고를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국내에서 진상규명이 어렵자
일본으로 넘어가 4.3 진상규명운동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1999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2000년에 시행됐다.
도민은 말한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고.
그리고 아픔을 발판 삼아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나아가자고.
어쩌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육지로부터 외면받아온 도민 사회가 큰 용기를 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부의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부터
4.3 특별법 개정까지 치유를 위한 많은 노력이 뒷받침되어 왔다.
그러나 요즘 엉켜버린 실처럼
제주4.3을 곡해하고 왜곡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4.3사건의 본질은 국가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사실관계 확인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개입설이나
빨갱이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조의 이야기는
유가족에게 두 번째 아픔으로 다가 올뿐이다.
언젠가 제주의 가장 낮은 곳부터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끝까지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길 고대하며,
더 이상 4.3사건이 아닌 제주4.3으로 온전히 역사에 남을 날들을 기대해 본다.
제주 봉개 /
제주의 아픈 기억을 걷다, 제주4.3 평화공원
끝.